비밀의 숲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을 보았습니다. 종영한지 조금 되었는데 이제 감상을 올립니다. 저는 넷플릭스로 보았어요. 넷플릭스가 정액제라 그런지 아까워서라도 자꾸 뭘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또 넷플릭스 버전과 tv 버전이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송출되는 장면은 물론 똑같은데 살인 사건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tv 버전에서는 피나 흉기 같은 것들이 블러 처리 된다고 하더군요.

처음에 골치 아픈 일들도 있고 해서 뭔가를 꾸준히 보는 게 귀찮더라고요. 그런데 <비밀의 숲> 첫 주 방영분을 본 이후에 결국 끝까지 보았네요. 그만큼 몰입감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물론 제가 모든 맥락을 전부 따라가진 못한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추리상으로는 이음새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보이고요.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위해 달리느라 몹시 억지스러웠던 드라마들을 생각하면 훨씬 좋은 점수를 받을만해요. 그런 각본의 틈을 메우는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충분히 극복된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고요. 주변 친구들은 이 드라마를 미드 못지 않다고 (좋은 의미에서) 이야기하지만 저는 몹시 한국적인 드라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정재계 인사들에게 뇌물과 향응을 제공하던 스폰서가 살해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겉으로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지만 기득권 내부의 깊은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는 사건이죠. 조승우가 연기한 황시목 검사와 배두나가 연기한 한여진 경위(형사)가 이 사건을 추적합니다. 내부의 적군과 아군을 가려내면서 점차 드러나는 거대한 진실에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각자 제 할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거대한 악을 단죄할 수 있을까요.

황시목은 어린시절 수술로 뇌의 일부를 절제한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 부작용으로 감정이 거세당한 삶을 살아가죠.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여전히 아주 옅지만 그래도 자신 안에 존재하는 희미한 감정을 느낍니다. 자신 안의 감정들을 확인해 나가는 방식이 유난스럽지가 않아요. 사실 이게 드라마틱하게 갑자기 희노애락을 강렬히 느끼는 게 더 이상하죠. 뇌 일부는 이미 잘려나갔고 그게 다시 생겨날리 만무하잖아요. 이미 결핍된 상황에서도 희미하게 무언가가 존재함을 자각하는 정도에서 멈춥니다.

모두들 황시목 검사에게 열광할 때, 저는 한여진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두가 매력적이고 입체적이에요. 어떻게 인물들을 이렇게 다 잘 살렸지 하고 감탄스러울 정도입니다. 다만 한여진은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해서 생경해요. 어떤 특별함도 없습니다. 네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죠. 성실함이랄까... 그런게 있네요. 형사로써 당연한 일들을 아주 성실하게 합니다. 근데 그게 드라마에 나오니 생경한 거예요. 만화책을 좋아하고 가끔 그림을 그려내는 덕후스러움도 탑재했죠. 열혈 형사라기보다는 성실한 형사이고, 오버스럽지 않고 평범한 인물입니다. 드라마의 모든 배우들이 연기를 다 잘해요. 모두가 온 몸으로 연기합니다. 사실 저는 그 부분에 반했어요. 배우들의 에너지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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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전반적으로 야외 촬영이 특별히 많다고 보긴 어렵지만, 로케이션을 잘 담은 것 같았어요. 동네를 담는 방식이 참 좋더라고요. 경사진 땅에 위치한 김가영의 반지하 집이나, 전망은 좋지만 옥탑방 신세인 한여진 형사의 집도 좋았어요. 전임 장관이 사는 복도식 아파트. 이런 설정들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감상을 쓰다보니 더 애정이 솟는 이 느낌..

무엇보다 우리가 추리수사활극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감정 과잉의 요소들을 몹시 절제한 것이 좋았고요. 주인공인 황시목과 한여진이 개인사의 복수를 위해 으아아아아 범인 너 가만안둘거야아아아~~~ 하고 통제를 잃은 채로 사건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검사와 형사라는 직업인의 소명만으로 사건에 개입하는 방식이 신의 한 수였어요. 시청자들이 덩달아 과잉된 감정 이입을 할 필요가 없었죠. 이입을 덜 하기 때문에 더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주요 인물들 모두가 자신의 일에 성실하게 임하고요. 보통은 이런 장르물에서 '그렇다치고' 넘어가는 것들이 많잖아요. <비밀의 숲>은 그런 나이브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심지어 회식 장면 조차 그럴 듯했어요.

최근의 이런 장르물들의 범람으로 우리는 모두 이런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반정부, 반기업 정서를 잘 이해합니다. 실제와 다르지 않고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게 없을 정도로 익숙해요. 우리 모두가 정치와 기업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슬프게도 아주 잘 알죠.. 다만 이 드라마에서 이창준이 쓴 편지가 나레이션으로 흐를 때, 덩달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간만에 새로웠습니다. 이 만연한 부패의 문제를 순간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로 인식한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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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장면이 몇 장면 정도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요!!!)


모두가 훌륭하다고 이야기하는 스웨터에 팔 떨어지는 장면, 복선으로도 훌륭했고 영검사를 추억하는 장면으로도 훌륭했죠. 아니 근데 영검사를 꼭 죽여야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 사건의 시점을 고려할 때, 연출 상의 감정적인 파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런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요.. 아니 왜, 대체 왜요.. ㅜㅜ 

이창준이 건물에서 떨어지는 장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멀리서 괴물이 뒤뚱뒤뚱 뛰어오던 장면이 생각났어요. 중요한 인물의 투신 장면인데, 저 멀리서 툭 떨어집니다. 하지만 효과는 더 컸던 것 같아요.

아이고. 장면들을 더 나열하다가는 끝이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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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아주 신속한 전개를 해나가지 않아요. 요즘 드라마들의 전개 속도를 생각해보면 더 느리게 느껴져요. 드라마는 사건 해결을 위해 조금은 더디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인물들이 감정에 빠져 허덕이거나 다른 전개에 빠지거나 하지 않고, 인물들의 움직임(성실함)과 미세한 것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의 힘은 각본과 연출, 배우들의 합에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간만에 볼만한 드라마를 선물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추천합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이게 막 데뷔한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것! 이수영 작가의 다음 드라마도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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