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_이렇게 더운 밤


날이 너무 더워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처음 내뱉는 말이 '아 덥다'입니다.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말도 '아 덥다'예요. 아니 우리나라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더웠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이렇게 더울 거라면 굳이 한국에 사는 의미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차라리 남쪽 나라 어딘가에서 사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요. 물론 다른 고려사항들이 존재하는 걸 알지만 어쨌든 온도의 의미로만 따지자면 그렇단 소리예요. 

예전엔,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대단히 좋은 건 줄 알았어요. 그렇게 배웠고요. 나이가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겨울을 좋아하거나 더위를 질색하는 사람은 좀 더 추운 나라에, 추운 걸 도무지 못견디거나 뜨거운 태양을 좋아하는 사람은 좀 더 더운 나라에서 사는 게 훨씬 이득인 것 같아요. 

사계절이 뚜렷한 것은 결국 삶의 유지 비용만 증가시킬 뿐이에요. 여름에는 여름옷이 필요하고 겨울에는 외투가 필요하고.. 집을 지을 때도 더위와 추위 모두를 고려해야하잖아요. 가전제품도 겨울용 여름용 다 필요하고요! 휴대용 선풍기를 사려고 신나게 알아보다가 겨울에 산 화장실용 히터가 구석에 쳐박혀 있는 게 눈에 밟혀 대체 사계절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습기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동시에 가습기도 있어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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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렇게 더운데, 시원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기보다는 차라리 지금 내가 남쪽 나라 어딘가의 바닷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똑같이 덥더라도 기분은 훨씬 나았을텐데..하고 한숨을 쉬는 밤입니다.



작년 여름, 방콕의 아속역 근처에 며칠간 머물렀어요. 대단히 유흥가라 밤이 되면 인종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취해있는 그런 거리예요. 


길을 따라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펍이 즐비합니다. 정말 관광하기 좋은 도시예요. 낮에는 수줍은 도시인데 밤이 되면 마치....

어쨌거나 유흥을 즐기기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실 눈살이 찌뿌려질 정도예요. 방콕에 머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구의 식민주의 (여기서는 한국이나 일본도 서구죠.)와 동남아시아의 셀프 오리엔탈리즘의 만남이랄까요.. 

그런 것 상관없이 그냥 이 분위기에 흠뻑 젖어들어도 좋았겠지만.. 밤이 되니 모든 것이 성애적으로 변하는 이 도시가 그냥 어느 순간 생경해요.

원래도 이방인이었지만 순식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모르면 보이지 않았겠지만 알고보면 심경이 복잡해지니까요. 전세계를 상대로 성을 파는 밤의 도시죠.



그래서 좋은 추억이 아니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충분히 좋았어요. 이 성애화된 장소에 덩그러니 있는 경험이 그렇게 거북하진 않았거든요. 기억 나는 건 정말 찌는 것 같은 밤의 온도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어요.

노천 식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로 치면 포장마차겠네요.



팟타이와 싱 맥주를 시켜서 마시는 데 이 순간이 정말 천국 같았어요. 맥주는 너무 시원하고, 태국은 무얼 시켜도 제 입 맛에 어긋나질 않았어요. 음식이 입에 맞았던 곳은 왜인지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 도시에 무얼하러 왔건 각자의 욕망이 있는 거겠죠. 나의 욕망은 팟타이와 차가운 맥주였던 순간이고요.


혼술하는 내 곁에서 묵묵히 술 동무가 되어준 아이입니다. 어쩌면 내내 저를 저렇게 빤히 봅니다. 머쓱해지더라고요. 호텔로 돌아가서 누웠는데도 한 동안 이때 마신 맥주의 온도와 이 아이가 생각나더라고요. 팟타이와 싱 맥주. 지금 너무 간절해요. 서울도 이렇게까지 더울거면 포장마차에서 동남아 음식을 팔아도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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